<수필-무한긍정 1>
주위 사람들을 무시하고 나 잘난 맛에 살았던 적이 있었다. 난 조부모, 부모님 다 건강하게 살아계시고 삶에 큰 문제가 없으며 노력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 그런 오만한 생각에 사로잡혀 주변 사람들에 별 관심도 없고 내 생각, 내 느낌, 내 미래가 가장 우선순위였다. 한마디로 인류애가 없던 지극히 이기적인 시절이 있었다. 그때가 중,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대학 진학 때 수능에서 가장 자신 있던 언어영역에서 한 지문에 속한 4개의 정답을 다시 훑어보다가 다 고쳐버렸는데, 다 맞을 뻔 한 문제, 4개를 다 틀려버렸다. 마치 신이 허락한 실수라도 되는 것 마냥...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자, 그냥 집 가깝고, 장학금도 주고 기숙사도 제공되는 저렴한 국립대에 진학했다. 그때부터였다. 인생에 대한 무한한 자신감이 사그라들었다.
대학 4학년 때 교육대학원에 진학하느냐, 취업을 해서 집에 보탬이 되느냐를 고민할 때, 어느 누구도 정말 나의 입장에서 헤아리고 생각하여 얘기해 주지 않았다. 엄마는 남동생이 둘이나 있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욕심이 많다. 외할머니는 어서 돈을 벌어 집에 보탬이 돼라. 엄마의 지인들도 지방대학원 나와 봤자다. 그저 현실적인 얘기, 자기 편한 데로, 첫딸은 살림 밑천이라는데, 대학원은 욕심이다 등등 그래서 졸업도 하기 전에 연락온 중소기업에 바로 취직을 했다. 교육대학원 입학처 담당자가 한사코 뜯어말렸다. 일단 등록은 하고 생각해 보라고 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알게 되었다. 왜 그때 그 입학처 담당자가 대학원에 꼭 다니라고 했는지... 그냥 대학원과 교육대학원은 결이 다르다.
결혼은? 독신주의자였는데, 연애 한 번 해보지 않고 처음 사귀어본 사람과 5년 정도 장거리 연애를 한 후, 급하게 결혼했으니 맘에 안 드는 게 한 두 개 이겠는가? 장점으로 보였던 부분이 최대의 단점이 되어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경상도 사람이라, 정말 과묵하고, 스킨십도 없고, 다정하게 말하는 법은 태초부터 배우지 못했다. 의논하는 법 없이 혼자 일을 처리하다 잘 안되면 뒷수습은 내 몫이다. 친정아빠가 수다스러운 사람이라 말 없는 게 너무 좋았는데, 살아보니 말 없는 게 큰 스트레스이다. 공부 잘하는 게 좋았는데, 공부 말고는 다 못하는 것 같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나에게 세 아들이 허락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빠와 엄마를 골고루 닮아 장점과 단점을 두루 갖추었지만,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예뻐 보이는 법이라는 말이 딱 맞게도 너무 사랑스럽고 귀엽다. 아이들은 커가고 화장실이 있는 큰 집으로 이사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남편의 큰 실수와 말리지 못한 내 실수로 전세금을 다 날렸다 보니 아직은 화장실이 하나인 24평 아파트에 월세로 산다. 큰 아이가 벌써 6학년이 되어 사춘기에 접어들기 시작하자 화장실에 오래 있기 시작했다. 30분 40분...
토요일 아침 꿀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막내 아이와 둘째가 화장실 앞에서 형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소변이 너무 급하다고 애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황급히 일어나서 노크를 하고 첫째 아이에게 소변만 빨리 싸고 나올 테니 열어주라고 했다. 막내가 둘째를 제치고 얼른 들어갔다. 그런데 실랑이하는 소리가 들렸다. '빨리 싸라', '보고 있으니 안 나온다...' 시간이 한 참 지났지만 결국 막내는 볼 일을 못 보고 화장실에서 쫓겨났다. 이번에는 둘째 아이가 급히 들어갔다. 안정적인(?) 표정으로 둘째가 금방 나왔다. 자기는 예민하지 않아서 소변이 바로 나왔단다. 사실 나도 소변이 몹시 급했다. 첫째 아이에게 어서 끊고 나오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첫째 아이 입장에서 생각하면 큰 볼일에 큰 방해를 받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생각을 전환했다. 막내아들에게 우리 동 바로 옆에 있는 상가 1층 화장실에서 볼일을 해결하고 아이스크림을 사 오자고 제안했다.
막내는 제 처지를 잊은 듯 신나고 밝은 표정으로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현관에서 기다렸다. 나도 급한지라 둘이 열심히 뛰어서 상가 1층 화장실에서 작은 볼 일을 본 후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 왔다. 뭔가 뿌듯했다. 예전에 나였으면 남편이 무능해서 화장실 두 개 있는 집에 살지도 못하고 내 팔자를 운운하고 시부모님 욕을 하고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고 소리 지르고 윽박지르고 모든 불행의 탓을 남에게 돌렸을 텐데, 어느새 난 조금 어른이 되어있었고, 긍정적이고 유연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주말이 시작되는 토요일, 온 가족이 둘러 앉아 아침밥을 뚝딱 먹어치우곤 시원하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으니 참 달고 더불어 인생도 맛있게 느껴졌다. 진심으로 감사했다. 이런 것이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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