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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TV리뷰 or 습작

에세이 습작-사무치는 그림움

by 논술쌤 작가 2024. 1. 22.

<가을에 사라진 엄마>

 올해 내 나이 마흔 두 살이다. 엄마가 마흔 두 살 때 나는 18살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지금의 나와 비교해 보면 엄마는 아주 어린 나이에 나를 낳았고 세상 풍파를 이겨가며 살았다. 굉장히 어린 나이에 나를 키웠다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때 하교를 하고 집에 가면 항상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 한 창 농번기에는 밭에서 일을 하고 계셨고, 농한기엔 집안일을 하고 계셨다. 농사일이 바쁠 때나 한가할 때나 언제든지 엄마가 틈틈이 손에서 놓지 않던 게 있는데, 그건 바로 책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고랭지 채소 출하 철이었다. 어느 날 엄마와 아빠가 심하게 다투셨고, 급기야 엄마가 숨을 잘 못 쉬어서 아빠가 바느질고리를 가져와 재빨리 엄마의 손을 따셨다. 그리고 몇 주 뒤 가을 엄마가 갑자기 사라졌다.

 

친할머니가 오셔서 초등학생을 전혀 배려하지 못한 반찬과 국을 내 오셨다. 쌀쌀한 바람이 불 때쯤이었다. 학교가 파하고 어김없이 가장 친한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 집에 엄마도 없으니 더욱 가기 싫었다. 친구네 할머니께서 호되게 혼내기 전까지 친구와 즐겁게 놀았다. 방에서, 들판에서 깔깔 웃으며 도란도란 얘기도 하며... 그 산통을 깨어놓은 할머니의 말은 내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 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없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지 어미가 아픈데, 동생들은 안 돌보고 이렇게 놀러나 다니냐, 어서 집에 가거라” ‘그랬구나, 엄마가 아파서 그렇게 오랫동안 집을 비우고 있는 거구나’ 그런데 왜 엄마는 나랑 인사도 안 하고 갔지? 왜 아빠나 할머니가 진지하게 엄마가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 설명해 주지 않았을까?' 억울함, 슬픔, 두려움, 죄책감 온 갓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더불어 어린 마음에 ‘이제 친구네 집에 놀러 못 오겠구나’라는 섭섭함도 더해져 집에 가는 산길을 멍하니 걸었던 것 같다.

 

<보고 싶은 엄마>

 그때부터였다. 부쩍 말수가 줄어들고 예민하게 굴었다. 그 해 겨울, 첫눈이 지난 어느 날 아빠가 5살 막내 동생을 데리고 서울에 다녀왔다. 동생은 물려받아 빛바랜 노랜 내 외투를 입고 갔다가, 갈 색 체크무늬 잠바를 입고 닌자 거북 신발도 새로 장착하고 해맑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어린 동생을 많이 보고 싶어 해서 동생만 데리고 엄마를 보고 왔다고 한다.

 

 나도 엄마가 너무나 보고 싶은데, 엄마는 언제 오는 걸까 하염없는 기다림이 계속되었다.

겨울 방학쯤 드디어 엄마가 돌아왔다. 9월부터 1월까지 못 봤으니까 5개월 가까이 못 봤던 것 같다. 너무 반가운데 너무 오랜만에 엄마를 보는 거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왜 말도 안 하고 없어졌냐고 짜증 내고 화를 내볼까? “ ”너무 보고 싶어서 힘들고 엄마가 다시 돌아오지 않아서 할머니랑 아빠랑 같이 살아야 하면 어쩌지?라고 걱정했다고 말할까 “ 등 여러 가지 말들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엄마 품에 안겨보는 거였다.

 

그런데 엄마 품에 안길 때 느낌이 예전 같지 않았다. 뭔가 딱딱한 느낌도 들고 엄마가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였다.

 

<죽을병에 걸린 엄마>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엄마가 자꾸 숨이 차서 동네 병원에 갔더니, 청진기로 숨소리를 들어보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당장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단다. 심장판막에 구멍이 나서 죽을 수도 있는 병이었고, 서울에 가서 큰 수술을 하지 않으면 오래 살기 힘든 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 당시만 해도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께서 큰 아들 내외에게 땅 한 평 물려주지 않고 농사를 시키며 살던 시절이라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와 아빠에겐 모아둔 목돈이 없었다.

 

아빠와 엄마가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찾아가 병원비를 부탁하자, ‘시집오기 전에 저희 집에서 병을 가지고 왔다’고 하시며 병원비를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야 가난해서 딸을 땅이나 있는 시골집에 시집보내며 지참금은커녕 가구하나, 반지 하나 해준 게 없을 정도였으니 병원비는 아예 보탤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위기의 순간, 엄마는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고만고만한 세 자녀와 남편을 위해서였을까? 아님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자기 삶에 대한 애정이었을까? 엄마는 심장재단에다가 장문의 편지를 써서 보냈고 그 편지가 채택되어 그 당시 신망이 높았던 경희대학교 심장외과에서 수술받고 입원해서 치료받는 모든 비용을 지원받았다.

 

<우리 엄마가 달라졌어요>

 엄마는 기사회생의 순간을 넘기고 병실에서 어떤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한약을 달여 먹고 겨우내 누워계시던 엄마가 3월이 되자 훌훌 털고 일어나 예전보다 갑절은 더 분주해지셨다.

 

주경야독의 실천가가 되어 새벽같이 일어나 애들을 챙겨 학교에 보내고 찬거리를 사 와 일꾼들 점심과 참 거리를 챙겨 먹이며 일을 시키고, 온 식구 저녁밥을 챙겨 먹인 후엔 책을 읽으셨다.

 

 엄마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운전면허를 따서 가을걷이가 끝나자 작은 트럭을 샀고, 새벽 소시장에 다니며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시더니 우사를 짓고 소도 키우고 농사도 지었다.      

 내가 중학생이 되어 읍내로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니게 되자 엄마는 방앗간을 차리셨고 거기서 나오는 현금으로 우리 가족은 약간의 여유를 누릴 수 있었다.

 

엄마는 방앗간이 자리를 잡자 본격적으로 검정고시를 준비하셨다. 중학교,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다 합격하고 내가 예비고1 겨울 방학 때 드디어 엄마의 오랜 소원을 이루셨다. 수필문학에 원고를 내고 심사를 거쳐 수필가로 등단을 한 것이다.

 

 지금도 등단 축하연은 잊을 수가 없다. 곱게 차려입은 개량한복이 퍽이나 잘 어울렸던 엄마는 내게 자랑스럽고 부럽고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한 존재가 되어있었다. 엄마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 곁에서 보아 왔던지라 신기할 따름이었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친구 몇 명을 대동했는데, 겉으로 표현을 하진 않았지만 엄마가 자랑스러웠다.

 

 <홀로서기 연습>

 고등학교는 여고에 가고 싶어서 외할머니가 계신 태백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그 후로는 일주일에 한 번이나 이 주일에 한 번 정도 엄마나 아빠가 데리러 오셨다. 고2 때 엄마가 새로 바꾼 차, <레조>를 타고 학교에 나타나셨다. 엄마가 참 멋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멀지 않은 국립대에 장학금을 받으며 진학했고 기숙사 생활을 해서 자주 집에 갈 수 있었다. 대학생활의 자유를 만끽하기는커녕 주말바다 집에 가는 내 모습이 생경했던지 친구들은 집에 꿀단지를 숨겨 두었냐고 농담조로 물었다.

 

 글쎄, 엄마가 있는 곳이 좋았다. 엄마는 활력이 넘쳤고, 포기하는 법이 없었으니까, 엄마를 보고 있으면 잘 살아내야겠다는 용기를 얻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대학 1학년이 지나갈 무렵, 나름 착한 딸이었던 내게 뒤늦게 사춘기가 찾아왔다. 내가 원치 않던 대학, 학과, 첫사랑의 실패, 상실한 인생의 목표등이 나를 옥 죄는 것 같았고, 대학교 2학년 겨울 방학 때 그 방황은 엄마에 대한 반항으로 나타났다.

 

죽고 싶다고 하며 정신병원에 보내달라고 모진 말을 내뱉었다. 엄마는 방안에 불을 모두 끄고 온몸을 꼬집었다. 두려움일까 배신감이었을까? 한참 두들겨 맞고 다신 엄마에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학과 사무실 게시판에 붙은 중국에 교환학생 모집 공고를 보고 바로 신청했고 덜컥 붙었다. 항공비, 용돈, 모든 것이 지원되어서 그런지 엄마는 허락했고 난 그 해 2월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에 있을 동안 엄마에게서 전자메일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대학에 특별전형으로 문예창작과에 입학했고 너무나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교환 학생 1년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바쁜 4학년을 보내며 교육대학원 지원도 하고 이력서도 내보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바쁘게 지냈다.

 

 교육대학원도 합격하고 회사 면접도 합격을 했다. 엄마는 계속 경제적 독립을 얘기하셨고 나도 더 이상 대학생 엄마에게 손 벌리고 싶지 않아서 취업을 선택했다. 주변에서 교육대학원이 아깝다고 말렸지만, 엄마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죽음>

 부산에서 3년 동안 회사 생활을 하다가 결혼을 하게 되어 남편을 따라 파주로 오게 되었다. 결혼 첫 해 사위 생일날 엄마와 아빠, 의정부 이모네까지 기습 방문을 했다.  큰 스티로폼 박스에 배에서 갓 받아온 싱싱한 홍게가 가득 들어 있었다. 큰 찜통에 쪄서 실컷 먹었다.

 

 아무도 몰랐다. 그게 엄마가 챙겨준 마지막 사위의 생일이라는 것을... 이듬해 여름 장마철,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딸, 이번 여름휴가 시댁 갈 거야? 엄마 보고 싶어.” “모르겠어요, 최대한 엄마 보러 갈게요~” 그리고 며 칠 후 비가 억수같이 쏟아 붙는 목요일 밤이었다. 동생이 엄마가 교통사고로 많이 다쳤으니까 어서 와봐야겠다고... 남편과 나는 빗길 무서운 줄도 모르고 액셀을 밟아 새벽에 병원에 도착했다.

 

이미 계속 울어서 퉁눈이가 되어 사람들을 마주했다. 나만 모르고 있었다. 엄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놀랄까 봐 미쳐 얘기할 수 없었다고 했다. 엄마가 그렇게 바라던 첫 손주를 결국 못 보고 소천하셨다.

 엄마의 DNA가 나에게 있는 것일까? 6개월은 힘들었지만, 툴툴 털고 일어나 열심히 2세를 준비했고 첫째 아들, 2년 후 둘째 아들, 또 2년 후 셋째 아들이 2살 터울로 태어났다. 친정엄마 카드가 없어도 씩씩하게 세 아들을 키워 어느새 큰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 내년에 중학교에 진학한다.      

 

다음회엔 엄마가 실제로 보냈던 편지들을 연재하겠다. 간단한 설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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